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양 전쟁 (문단 편집) === 문화권이 다른 전장의 야만성 === 당시 [[유럽]] [[서부전선#s-2]]의 [[독일 국방군]]은 인종주의에 찌들었지만, 일단 [[영국인]]과 [[미국인]][* [[영국]]계로 출발하고 [[독일]]계 이민자들이 많았던 만큼, 독일처럼 순수하지는 않지만 [[앵글로색슨족]] 역시 고대 [[게르만족]]의 한 일파로서 우수한 민족이라고 주장했다.]에 대하여는 그저 전쟁에서 적으로 만난 자들일 뿐, [[유태인]] 등 자신들이 열등 인종으로 분류한 집단들과 달리 우선 절멸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더군다나 문화권에 어느 정도 공통점도 있고, 결정적으로 대화가 어느 정도 통하다 보니, 비인간적인 전장의 한가운데서도 마지막 남은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애를 상기시킬 수 있는 극적인 이벤트 등이 벌어지면서 전쟁의 비인간성과 야만성이 희석되었다. 그러나 문화와 언어가 완전히 달라 일선의 병사들 간 어떠한 소통도 불가능했던 태평양 전장에서는, [[소련군]]과 [[나치 독일군]]이 맞붙고있던 동부전선과 동급으로 서로 야만성의 극치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유럽]] 전선의 아비규환은 [[서유럽]] 전선이 아닌 [[동유럽]] 전선에서 벌어졌다. [[냉전]] 당시 자유진영의 적국이었던 [[소련]]이 겪었던 참상에 대해서는 자유진영이 별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은폐했다. 그러다가 [[소련 붕괴|소련이 무너지고]] 과거 소련 측 기록들이 기밀해제되면서 그제서야 동유럽 전선도 태평양 전선 못지않은 아비규환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또한 [[헤이그 협약]]을 통한 교전권의 개념과 [[제네바 조약]]을 통한 '포로, 비전투원 및 민간인의 지위'에 대한 개념은 기본적으로 서양문화로부터 형성된 것으로, [[일본군]]의 문화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개념이기도 했다. 패색이 확실하면 발악을 하기보다는 대체로 교전수칙을 따라 손을 들고 자비를 청하는 [[독일군]]과 달리, 일본군은 '싸우다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야스쿠니]]에 가서 영령이 되지만, 항복하면 그냥 개죽음, 남은 가족은 강간당한다'는 식으로 세뇌당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무조건 항복하지 않고 싸우거나 대화도 통하지 않으니 항복하는 척하고 한 명이라도 더 죽이려고 들었다. 간단한 예로 [[일본군 군가]] 중 하나인 <[[동기의 벚꽃]](同期の桜: 도키노 사쿠라)>에 나타나 있다. 게다가 [[포로]] 문서에 보다시피, [[미군]]이 [[서부전선#s-2]]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유대인]]이 아닌 이상) 힘들지언정 최소한 포로로서 대우는 받았다. 본국에서 적국의 아군 포로들을 위해 식품이나 의약품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으며, 야사에 따르면 [[모노폴리]] 보드게임(…)에 탈출장비를 숨겨 보내서 포로를 탈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달리 말해 '''포로들에게도 보드게임과 의약품 정도 제공은 해 줬다는 소리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잡히면 뭔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일본군 역시 개전 초기에는 미군에 포로로 잡히면 자신들의 가족이 본토에서 '불명예자의 가족'으로 멸시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전쟁 후기에는 미군도 일본군 못지않은 잔혹성을 보이면서[* 물론 [[일본군]]의 잔혹성에 격분해 더 잔혹해진 면이 크지만, 상술했듯 열악하고 처참한 환경의 전장에서 전쟁을 치르니 그 스트레스는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는 일본군과 [[미군]] 모두 마찬가지로, 양측 모두 더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장소는 더 가혹한 환경의 전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한 [[귀축영미]]의 이미지가 일본군의 머릿속에 굳어져 갔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인간으로 보지 않으니 온갖 참상이 발생했는데, 일본군은 정식 절차를 밟아 항복한 미군 병사들에게 [[죽음의 행진]]을 시켜 엄청난 수의 사망자를 고의로 양산한다든가[* [[독일]]도 [[말메디 학살]]이나 유대인들을 이동시키면서 낙오하는 자들을 굶겨죽이거나 쏴죽이는 등 참상이 벌어졌다.] 아니면 [[치치지마 식인 사건|아예 술자리에서 안주가 부족하다며 특별한 술안주라는 명목으로 잡아먹은 사례도 있다.]] 더군다나 이 사건은 [[밀리환초 학살사건|극한 상황]]에서 한 일이 아니라 사기를 고양한다는 명목으로 한 거라 그 잔인성은 다른 식인과 비교할 수 없다. 굳이 변호를 하자면 치치지마 이외에는 '''재미로 [[식인]]을 한 사례는 없다.''' 오죽하면 저 사건을 일으킨 [[다치바나 요시오]]의 행위는, 동시대의 일본군조차 경악할 수준이었다. 또한 자국 민간인까지 거짓 선전으로 연합국의 이미지를 악화시키고, 언어나 문화가 다르니, 민간인들 역시 이를 과장은 있을지언정 사실로 받아들였다.[* 더군다나 [[미 해병대]] 특유의 호전성으로 인한 시체 훼손 등에 대한 자료는, 그런 프로파간다를 가속시키기에 더할나위 없는 재료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대전 후기에 이들을 집단 자살하게 만들거나, "패배하여 똑같은 처우를 받느니 차라리 일본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식으로 정신대/강제노동에 끌려가 일본인들[* [[일본군 위안부]]는 [[식민지]]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자국민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나마 식민지 출신에 비해 처우가 조금 나은 정도였다.]과 조선인 등 식민지 주민들은 인간성을 유린당할 것을 강요받았고, 그로 인한 피해도 컸다. 더군다나 점령군인 [[일본군]]은 자신들의 점령지의 문화에 대해서도 그다지 친화적이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이 대규모 [[식민지]]를 장기간 경영한 경험이 없어서, [[영국]]이나 [[프랑스]]가 '''몇백년에 한 번 할까 말까 한 대학살 수준의 탄압만 보고 자란 덕분에,''' 대부분의 식민지에 무작정 그렇게 대한 것이다. [[일제강점기|한반도 식민지배]]의 과정도 참 어이없게, 시작부터 [[무단 통치|총칼 앞세워 무작정 찍어 누르다가]][* 처음 식민지를 만들었을 때는 유화정책을 펼쳐서 식민지배에 굴종하게 만드는 것이 공식이다.] [[3.1 운동|어마어마한 반발]]을 겪은 뒤에는 또 [[문화 통치|완전히 다 풀어줘서]][* 이간질이나 [[친일반민족행위자]] 양성이 목표였고, 어느 정도 목적은 달성했지만, 그와 동시에 [[독립운동]] 세력의 제압도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독립운동]]을 할 환경을 조성해줘 버리는(…) 바보같은 수순을 밟았다. 덕분에 15년 가까이 [[민족말살통치]]를 시행하는데도 조선을 일본화하는 데에 실패했다. 식민지배에서 식민지인들이 대규모로 저항 활동을 한번 벌이면 최소한 '''100년'''은 잡고 제압해야 한다. 저항활동을 총칼로 때려잡고 나서도, 저항에 참여했던 식민지인들이 "우리 그때 대단했지" 식으로 생각하면서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배할 당시 온갖 회유와 협박을 끊임없이 했음에도 결국 실패하고, [[알제리 독립전쟁|알제리가 독립]]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많은 숫자의 원주민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착취당하였고, 그 결과 대부분의 남태평양 군도에서 지금까지도 90세 이상의 원주민 어르신들은 잽([[jap]])의 j자만 나와도 이를 부득부득 갈며 욕하기 바쁠 정도로, 일본의 이미지는 악화되었다.[* 한 일화로 어떤 일본인이 이 원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 원주민 노인들이 [[기미가요]]를 잘 부르는 것에 신기해서 어떻게 기미가요를 잘 부르냐고 묻자 노인들이 그렇지 못하면 '''죽었다'''고 말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당장 일본군과 원주민이 우호적으로 지냈던 섬은 일부 덕장들이 지배했던 [[인도네시아]]나 [[부건빌]] 정도를 제외하면 극히 드물다. 오죽하면 원주민들은 "식민지배하던 백인들이 압도적으로 낫다"며 백인, [[미군]], [[영국군]], [[호주군]] 같은 군대를 솔선수범해서 도왔다. 예를 들어 과달카날에서 해안감시원을 하다 일본군 이치키 부대에 잡혀서 고문당하고, 목을 총검으로 찔린 뒤에도 놀라운 투혼으로 탈출에 성공해서 미군에 [[일본군]]의 공격을 알리고 [[은성훈장|은성무공훈장]]을 비롯해 [[영국]] [[기사작위]]까지 받은 자콥 C. 보우자(Jacob Charles Vouza)라는 원주민도 있을 정도다. [[https://www.thegazette.co.uk/London/issue/47877/supplement/43|관보 링크]] 일본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면 [[기미가요]]를 잘 부르는 원주민 노인들이 나온 바 있는데, "못 부르면 일본군이 죽여서" 살기 위해서 불렀다고 했다. [[일본의 피해자 행세]]에 대해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가장 큰 이유기도 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